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카고 대화재 (문단 편집) == 1873년 공황의 기폭제가 되다 == 시카고 대화재는 [[시카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미국사]]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860년대 동서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은 전례 없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1870년대에 들어서는 너도 나도 새롭게 발전하는 산업이었던 철도 건설과 운송 사업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철도 산업의 수익성이 너무 낮아 정부가 눈물을 머금고 기업들에게 각종 혜택을 배풀어야했으나, 동서횡단철도가 건설되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운송 비용이 낮아진데다 추가적인 철도 건설까지 보장되자 모두가 한탕을 노리고 철도 건설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도 건설 산업 붐은 어디까지나 그 특성상 더욱 많은 자본이 유치되어야 유지될 수 있음을 뜻했고 자연스럽게 불안정한 산업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붐이 꺼진 하나의 이유가 시카고 대화재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 중서부 제1의 대도시인 시카고의 중심지가 사실상 전소하면서 전례 없는 대도시 전면 재건축 사업판이 시카고에 펼쳐졌고 이는 수많은 미국 토건 사업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대륙횡단철도 건설 이후 미국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카고였기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파산할 위험도 컸던 철도 산업 투자에 비해 시카고 대화재로 인한 재건축 사업은 시카고 시민들이 갑자기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가지 않는 한 성공할 확률이 훨씬 컸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토건 사업가들은 철도 건설 및 운송 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시카고 재건축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871년 보불전쟁과 그 이전의 보오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타협,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파리 코뮌 등등으로 인한 유럽의 정치, 외교적인 불안이 확산되면서 유럽의 증시가 폭락했고, 다급해진 유럽 자본가들이 미국 철도 사업에 투자했던 자본을 회수해가면서 순식간에 철도 사업은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을 수 없을정도로 투자자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으며 줄줄이 도산하였다. 철도 사업의 도산으로 인해 남북전쟁 당시 채권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채권왕" 제이 쿡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거부들과 유니온 퍼시픽 철도, 노던 퍼시픽 철도 등 거대한 철도 회사들이 파산을 선언했고, 이들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사람들은 불안에 휩쌓여 은행에 맡겨둔 돈을 급하게 찾으려고 은행으로 밀려들었다. 뉴욕 금융거래소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10일간 폐장되었지만 때는 늦었다. 전 미국의 증시가 폭락하고 공황이 찾아온 것이다. 이를 1873년 미국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이라고 부른다. 1870년대 장기불황은 미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기불황은 기존 미국의 사업을 떠받치던 철도 사업과 농업, 전통적 공업의 종말을 의미하였으며 장기불황을 통해 미국 산업은 대대적으로 구조조정되었다. 특히 밴더빌트와 J.P. 모건 등의 사업가들이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작은 기업들을 합병해 사업을 크게 불리는 방식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1873년 불황기에서 시작되어 1893년까지 유지된 이러한 시대를 도금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서부의 농민들은 장기공황으로 삶이 크게 어려워졌으며, 이들을 타겟팅한 "인민주의(포퓰리즘)" 운동과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등장했는데 이는 [[민주당(미국)|민주당]] 진보화의 서막이었다. [[분류:1871년 화재]][[분류:시카고]][[분류:재건 시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